폴짝 뛰어, 동그라미
Jump, Circle


2021.6.8. - 2021.6.20.


유영공간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349 국제빌딩 4층)





요즈음의 풍경이란 단어는 어딘가 멀리 떠나야만 볼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팬더믹 시대 앞에 더욱 그러하다. 나는 실제로 창문 밖의 건물과 주변의 야경, 저 멀리에 보이는 작은 산등성이들을 풍경이라 말하지 않는다. 자연 앞에 나가지 않으며 풍경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나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다 보니, 근래엔 괜찮은 풍경화를 구경한 지도 오래였다. 
그러다 공모를 통해 작가 최가효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최가효의 그림을 본 순간, 바로 현실에서 벗어나 낯설고 알 수 없는 미지의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속의 나를 느끼게 하는 힘을 느꼈다. 이런 게 풍경화였던가. 


풍경의 본질은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끊임 없이 변하고 움직인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풍경이 우리의 기억과 무의식, 직관, 세계관을 투사하여 나온 반영물이라는 점이다. 풍경의 무상성無償性을 고정된 한 순간의 장면으로 재현하는 것은 풍경의 본래 모습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풍경은 그 자체로 무상성을 내재하고 또 표현하고 있다. 풍경을 그럴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풍경이, 객관적인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의 의식의 반영물이기 때문이다. 풍경은 앞에 놓인, 현전하는 객체라기 보다는 우리 의식의 스크린에 투사된 일종의 시물라크르다. 그렇기 때문에 풍경은 고정되지 않으며 무수하게 반복적으로 차이를 이루며 재생된다. 최가효의 그림은 이 모두가 느껴지며 감상자를 그 풍경 안에 데려다주었으니 좋은 그림이라 말하겠다. 

작가 최가효가 만들어낸 세계는 균열과 구멍으로부터 시작되어진다. 최가효의 안온하던 일상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두드리는 듯한 그림들을 초반작업으로 볼 수 있었다. 이번 [폴짝 뛰어, 동그라미]에선 균열로 태어난 구멍과 문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혹은 그 구멍(동그라미)를 넘어갔을 때에 존재하는 광활한 대지와 산맥들, 그 안에서 뛰노는 동물과 새가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그곳으로 나아가는 문과 구멍, 경계 속 인물들과 관계를 보여준다.

가벼운 스케치 위에 탄탄하게 쌓아간 그녀의 풍경 속 색들은 다양하고 화려한 색체를 씀에도 불구하고 차갑지만 광활하고 차분하지만 자유로우며 강하다. 푸르고 깊은 색들을 미묘하게 쌓아 올린 산의 색채들이 특히 그러하다.

작가가 색을 쓰는 방식과 작업의 주제를 결정하는 디테일인 실제 구멍이라거나, 오일 파스텔로 표현한 부분들, 섬세하게 쌓아올린 색들은 그림에 반짝이는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과감한 화면 구성들로 인해 어떻게 보면 평면적인듯한 그림 세계 속에 깊이감을 만들며, ㅣ상하게도 광활한 어떤 풍경 앞에 서 있는 듯한 감상을 일으킨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가 되어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규정 지을 수 없는 대자연을 목도한 것 같은 감정의 일렁임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그림의 작업적 발전과 이어나감 속에 어떤 신화적인 서사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붉은 대지와 산, 짙고 어두운 하늘과 물의 풍경들, 어디론가 드넓게 인도하는 대지와 길들, 그 곳에 태어난 구멍 (차원의 문)을 통해 타고 올라오는 ‘현재'와 ‘현세'를 벗어나 자유로운 세계에 당도한 인간들의 모습이 마치 어떤 세계의 창조를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도착한 최가효의 풍경 속에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차원의 동그라미들과 그 안팎에 우리가 고대하던 자유의 세계들이 존재한다. 우리를 떠나게 한다. 우린 그림 안을 헤매다 구멍을 통해 또 다른 자유세계를 향해 도망쳐야 할 것 같은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린 곧 동그라미 속으로 사라진다. 두 발을 띄어 어떠한 모든 우리의 풍경 속으로!

글/ 조유경
기획/ 유영공간



하나의 동그라미가 있다. 어느날 벽에 영문 모를 동그라미가 생긴 것이다. 미처 고리를 통과하지 못한 햇볕의 그림자도 아니고, 푸르스름한 솜털이 달린 곰팡이도 아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잔 누군가의 진득한 흔적도 아니었다. 보자 보자, 아닌가, 그럴 수도 있나? 미스터리의 소름이 돋기 전에 뚫어지게 보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자꾸만 동그라미가 신경 쓰인다. 정답을 결정짓지 못한 당신은 흔들린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한 번 더 자세를 가다듬어 본다. 자세히 보니 선이 조금 삐뚤빼뚤한 것 같기도 하고, 안이 움푹 패인 것 같은데 오히려 볼록한 것 같기도 하다.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어쩌면 원이 아닌데 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나 싶다. 좋아,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지만 아이처럼 용기 내어 만져보자. 조금 높이 있네, 까치발을 들고

두 발이 동시에 바닥에서 떨어지자 아이가 날아올랐다.

동그라미는 구멍이었나, 낯설지만 언젠가 꿈꿨던 공간을 보았다.
동그라미는 보드라웠나, 존재한 적 없는 동물의 오묘한 털을 만졌다.
동그라미는 기억이었나, 바다 아래에서 주운 조개 껍질이 섬광처럼 반짝였다.
동그라미는….

폴짝 뛰는 순간 동그라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시작선과 끝선을 이어 선을 닫는다. 시작된 지점으로 선이 다시 돌아오면 선은 도형이 된다. 그 도형은 세모일 수도 있고 네모일 수도 있고 별일 수도 있지만 선이 꺾이기 전 본연의 형태는 원형, 동그라미다. 선을 닫아 동그라미를 만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형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동그라미는 상상의 원형(原形)이기도 하다. 동그라미는 나에게 상상의 구멍이 되어주었다.

구멍은 안과 밖을 만든다. 내가 있는 곳과 내가 있지 않은 곳을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 세계를 연결하기도 한다. 구멍을 통해 안과 밖이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밖에서 떠다니던 먼지가 안에서도 부유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구멍은 눈앞을 가로막던 단단한 벽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단서가 되어준다. 우리는 구멍을 통해 너머의 세계를 목격할 수 있다.
문풍지를 손으로 뚫어 그 안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구멍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발원지로 확인의 열망을 증폭시킨다. 좁은 시야가 키워낸 상상이 구멍을 서서히 넓혀 결국엔 구멍 밖으로 손을 내밀고 발을 내딛게 한다. 예고 없이 출연한 구멍이 평온하던 당신의 일상에 균열을 내고 항상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처럼 속이 빈 동그라미는 상상으로 채워지고, 상상은 우리를 뛰어들게 한다. 마치 예술이 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처럼, 구멍 또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터뜨리게 한다. 뛰어드는 힘의 시초에는 구멍이 있다.

나는 <폴짝 뛰어, 동그라미>전을 통해 미지의 영역을 가상의 공간으로서 구체화하고자 한다. 폴짝 뛴 당신이 동그라미 모양의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간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당신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자유세계’로 명명 되어 너머의 세계를 건드린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호하지만 영롱한 빛깔의 세상에서 다 벗어 던졌지만 헐벗지 않은 몸으로 뛰어다닌다. 당신은 그림 속 인물들에 스스로를 대입하며 개인적인 이상 세계를 펼칠 수 있다. 얇은 색으로 겹겹이 쌓인 불투명한 세상에서 대략적인 윤곽과 색깔을 힌트 삼아 상상과 유추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동한다. 내밀한 환상의 영역을 마음껏 누비다보면 삶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을 찾을 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작가와 관람자의 서로 다른 상상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며 그 거리감을 서사화하는 하나의 시도인 동시에, 실질적 여행이 불가능한 현 시대의 한계를 무한한 상상으로 메워 새로운 여행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전시가 도망이 아니라 발 붙인 삶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넓혀주고 너머의 세계로 달려들 용기를 끌어모으는 또 하나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






gahy0199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