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레이어 한 꺼풀
A Transparent Lyer Like an Eyelid


2022.2.22. - 2022.2.28.


서진 아트 스페이스
(서울 중구 동화로 27길 30 1층)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투명 레이어, 그 너머는 뚜렷하게 각막에 얹힌다. 하지만 갈 수 없다, 무의식과 꿈과 현존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한다. 허공에 소리를 질러본다. 공기는 벽을 넘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르니. 음파! 거센 파열음이 타격을, 파동을, 충돌을, 균열을, 쨍그랑! 날카롭지만 고요한 폭발. 빛에 반짝이는 파편들. 깨질 듯 청명한 얼음조각 혹은 유리 결정체 혹은… 아, 수박설탕인가?

그는 너머에서 당신의 숨죽인 비명에 귀기울이고 있다. 겹겹이 둘러싼 안개를 뿌리치며 외친다. 문을 열어. 깨뜨려. 터뜨려. 부숴 버려! 들어와. 나에게로 와. 발을 떼는 순간 한번도 사랑한 적 없는 것들이 너를 맞아줄 거야. 이 모든 것이 수박설탕 안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수박설탕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여행하게 될 거야.* 그가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어떻게 넘어가나요? 눈꺼풀을 들어올려, 렌즈를 벗어, 무거운 굴절유리를 벗어, 불투명 레이어를, 편견을, 현실을 벗어. 하나씩 벗어올리자. 비로소 마지막 레이어를 마주했을 때 과도를 들어 달콤한 과당을 끈적하게 베어버리자. 파도처럼 막을 흔들어 깨우자. 용기를 끌어당겨 몸을 내던지자. 넘실넘실 넘어가자.

그러자 유한한 당신이 무한한 세계로 그림자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약간의 울렁임과 현기증과 흐느낌도 함께. 언제나 따라오는 것. 무분별한 벌판과 작열하는 태양에 맨몸으로 안긴다. 중력이 뜨겁게 녹아내리는, 모르는 것도 환히 보이는, 영롱한 퇴적층에 몸을 누이자 수정체를 채운 못이 일렁인다. 순간 당신은 깨닫는다. 처음을 기억하는 세상이구나! 투명한 역사 안으로 끝까지 녹아내릴 거야, 또 다른 층계에 도달할 날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당신은 달달한 가능성 안으로 몸을 맡긴다.


*<워터멜론 슈가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인용.
"이 모든 것이 워터멜론 슈가 안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워터멜론 슈가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1. 가벼운 그림

그림을 그리다 보면 레이어를 쌓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물감층을 바르고 마르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는 동안 몽상이 부푼다. 한 겹의 레이어에도 역사가 쌓이고 있다고, 당시 내 무의식과 공기와 기분도 물감에 섞여 발리는 것이라고. 물을 얼만큼 섞을까, 어떤 색과 어떤 색을 섞을까, 이렇게 한다면 어떤 형체가 될까. 그런 고민이 그림에 시시각각 올라간다. 물감층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마치 영롱한 퇴적층 위에 하나의 세계가 세워지는 것처럼, 마치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레이어가 두꺼워질 수록 세계는 점점 탁해지고 불명해진다. 무엇이든 무거워지면 처음을 잊는다. 그래서 나는 가벼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 모든 것이 환히 보이는 그림. 마음은 시시각각 달라지니까 처음 캔버스를 마주했을 때의 설렘을 남기려 노력한다.


#2. 자유 세계

다량의 물을 섞어 얇은 색을 바른다. 이 이미지가 누군가에게 타격이 되고 촉발점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주저하던 것을 무너뜨린 뒤 무릎에 힘 꽉 주고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림이 감상자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인지, 이것 또한 몽상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진지한 화두다. 너머의 세계로 뛰어들 용기는 발붙인 삶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일단은 내 삶과 일상을 관찰한다. 나는 언제 자유를 느끼는가. 요즘은 심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 묶여있다. 정박한 배는 수평선 너머를 꿈꿀까? 자유는 꿈꿀 수록 아름답지만 꿈꿀 수록 위태롭다.

내가 자유로울 때는 어느 때보다도 붓을 들고 하얀 종이 앞에 앉았을 때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붓질이 화폭에 담긴다. 그것만으로 자유를 전할 수 있을까? 다행히, 아니면 불행히도 우리는 발 붙이고도 모니터 안으로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모니터 안에 현존을 외치고 있는 사진들을 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생경하게 서 있는 나. 저곳엔 자유가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하지만 착각이나 소망이겠지. 그래도 좋다. 모른다는 사실은 가능성을 남겨준다. 자유에 대한 예측이 또 다른 레이어가 되어 내 삶과 사방으로 겹쳐진다. 결국엔 낯선 것들에 대한 이해도 본 적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되지 않던가. 그렇게 자유를 그려 본다. 자유를 그리면 감상자도 자유로워질까?


#3. 시각 예술

이번엔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보는 것만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가만히 있기보다 움직여야 자유로워지는데 회화가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도깨비 방방도 없는데 폴짝 뛰어오르게 할 수 있을까? 뛰어, 라고 쓴다고 이 진지한 갤러리에서 감상자가 뛸까? 감상자가 예절이라곤 까맣게 모르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볼까? 의문이 계속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먹고 있는 사람을 보면 배고파 진다. 자고 있는 사람을 보면 졸려진다. 뛰고 있는 사람을 보면 뛰고 싶어질 수도? 결과를 보고 생기는 욕망에 기대보기로 한다. 그래, 자유로운 사람을 그리자.

캔버스 앞의 나에겐 당신이 무얼 보게할 지에 관한, 아주 작은 힘이 주어진다. 그래서 종종 회화가 일방적인 외침처럼 느껴진다. 물론 당신 또한 자신의 ‘보기’에 대한 권력을 갖고 있다. 나의 외침을 들을 지 말지 선택하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당신에게 달려있으니까. 우리는 캔버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서있다. 나는 무엇을 외칠까. 나의 외침이 벽에 가로막혀 튕겨 나가지 않고 당신에게 끝까지 미칠 수 있을까? 우리의 사이에는 여러가지 투명하고 불투명한 레이어들이 있다. 각막, 눈꺼풀, 안경 혹은 렌즈 같은 것일 수도 있고 공기, 먼지, 햇빛, 소리일 수도 있고 미뤄둔 스케줄, 의무와 책임, 편견일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까? 아니면 서로를 환하게 비추어줄 수도 있다.

나는 캔버스에 겹겹이 쌓인 알록달록한 물감층들도 우리 사이를 환하게 비추어줄 유리창이 되어주리라고 믿는다. 레이어가 당신만의 자유세계, 맑고 투명한 너머의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내준다. 존재하는데도 차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당신의 상상을 자극해서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들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종국엔 그림 너머로 통과하려는 욕망을 일깨울 수도 있지 않을까. '봄'으로써 묻어뒀던 '자유'를 꺼내어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4. 수박 설탕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소설 <워터멜론 슈가에서>에서 목가적 꿈이자 정신적 풍요의 세상 아이디아뜨(iDeath)가 수박설탕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했다. 수박당으로 집도 만들고 옷도 만들고 음식도 만든다. 끈적하고 미끄럽고 반짝이는 세상, 나도 수박설탕에서 살고 싶다. 따사로운 햇볕에 살살 녹아내려 구멍이 날 수도 있다. 그 구멍은 어디론가 다른 층으로 통하는 문이 되어준다. 구멍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겹겹이 쌓인 레이어를 보며 시간의 흐름을 목격한다. 켜켜이 쌓인 과거를 한 눈에 목격할 수 있겠다. 결정체 모양의 세계는 구멍 속에서 미끄러지다가 다른 층계의 세상 앞에서 멈출 수도 있다.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설렘 가득 달콤하겠다.

그렇게 당도한 자유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뛴다. 어느 구멍으로 온 지 모를 사람도 있다. 당신도 유리창 너머를 믿고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섰겠지. 헐벗었지만 헐벗지 않은 몸으로 자유롭게 나다닌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가능성을, 자신의 존재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다.

그것들이 새로운 레이어로써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 레이어를 깨부수고 당신은 또 나아갈까, 당신만의 세상으로.



글/ 최가효
기획/ 방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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