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짝 뛰어, 동그라미


2020.10.19


최가효

하나의 동그라미가 있다. 어느날 벽에 영문 모를 동그라미가 생긴 것이다. 미처 고리를 통과하지 못한 햇볕의 그림자도 아니고, 푸르스름한 솜털이 달린 곰팡이도 아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잔 누군가의 진득한 흔적도 아니었다. 보자 보자, 아닌가, 그럴 수도 있나? 미스테리의 소름이 돋기 전에 뚫어지게 보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자꾸만 동그라미가 신경 쓰인다. 정답을 결정짓지 못한 당신은 흔들린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한 번 더 자세를 가다듬어 본다. 자세히 보니 선이 조금 삐뚤빼뚤한 것 같기도 하고, 안이 움푹 패인 것 같은데 오히려 볼록한 것 같기도 하다.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어쩌면 원이 아닌데 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나 싶다. 좋아,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지만 아이처럼 용기 내어 만져보자. 조금 높이 있네, 까치발을 들고

두 발이 동시에 바닥에서 떨어지자 아이가 날아올랐다.

동그라미는 구멍이었나, 낯설지만 언젠가 꿈꿨던 공간을 보았다.
동그라미는 보드라웠나, 존재한 적 없는 동물의 오묘한 털을 만졌다.
동그라미는 기억이었나, 바다 아래에서 주운 조개 껍질이 섬광처럼 반짝였다.
동그라미는….

폴짝 뛰는 순간 동그라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시작선과 끝선을 이어 선을 닫는다. 시작된 지점으로 선이 다시 돌아오면 선은 도형이 된다. 그 도형은 세모일 수도 있고 네모일 수도 있고 별일 수도 있지만 선이 꺾이기 전 본연의 형태는 원형, 동그라미다. 선을 닫아 동그라미를 만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형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동그라미는 상상의 원형(原形)이기도 하다. 동그라미는 나에게 상상의 구멍이 되어주었다.

구멍은 안과 밖을 만든다. 내가 있는 곳과 내가 있지 않은 곳을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 세계를 연결하기도 한다. 구멍을 통해 안과 밖이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밖에서 떠다니던 먼지가 안에서도 부유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구멍은 눈앞을 가로막던 단단한 벽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단서가 되어준다. 우리는 구멍을 통해 너머의 세계를 목격할 수 있다.
문풍지를 손으로 뚫어 그 안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구멍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발원지로 확인의 열망을 증폭시킨다. 좁은 시야가 키워낸 상상이 구멍을 서서히 넓혀 결국엔 구멍 밖으로 손을 내밀고 발을 내딛게 한다. 예고 없이 출연한 구멍이 평온하던 당신의 일상에 균열을 내고 항상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처럼 속이 빈 동그라미는 상상으로 채워지고, 상상은 우리를 뛰어들게 한다. 마치 예술이 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처럼, 구멍 또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터뜨리게 한다. 뛰어드는 힘의 시초에는 구멍이 있다.

나는 <폴짝 뛰어, 동그라미>전을 통해 미지의 영역을 가상의 공간으로서 구체화하고자 한다. 폴짝 뛴 당신이 동그라미 모양의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간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당신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자유세계’로 명명 되어 너머의 세계를 건드린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호하지만 영롱한 빛깔의 세상에서 다 벗어 던졌지만 헐벗지 않은 몸으로 뛰어다닌다. 당신은 그림 속 인물들에 스스로를 대입하며 개인적인 이상 세계를 펼칠 수 있다. 얇은 색으로 겹겹이 쌓인 불투명한 세상에서 대략적인 윤곽과 색깔을 힌트 삼아 상상과 유추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동한다. 내밀한 환상의 영역을 마음껏 누비다보면 삶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을 찾을 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작가와 관람자의 서로 다른 상상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며 그 거리감을 서사화하는 하나의 시도인 동시에, 실질적 여행이 불가능한 현 시대의 한계를 무한한 상상으로 메워 새로운 여행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전시가 도망이 아니라 발 붙인 삶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넓혀주고 너머의 세계로 달려들 용기를 끌어모으는 또 하나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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